하나님의 종 거지(巨知) 이중표 목사님의 생애
이강석(별세 목회연구원 연구실장) 記
종에게는 사랑하는 아내 안경애 사모가 있고,
슬하에 아들 이광선 준목과 며느리 김태신, 손자 이은준이 있다
01 은혜의 생애
(1) 눈물을 먹고 자란 성장기(成長期)
종은 이 민족의 국치일인 1938년 8월 29일, 서해안 변산반도 산줄기 끝자락 한 마을에서 아버지 이상봉, 어머니 백분순 성도의 슬하에 태어나 어머니의 눈물을 받아먹고 효자 되기를 소원하며 성장하였다. 12년 학창시절 전 기간에 한 번도 도시락을 싸들고 학교에 갈 수 없는 가난한 세월을 살았지만, 점심시간 주린 배를 물로 채우고 잔디밭에 누워 가슴에는 하늘을 품었다. 초등학교 시절 임진왜란의 민족적 참상을 가르치며 흘리던 담임선생님의 눈물도 그 마음에 담았다. 그로부터 종은 일생 민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이순신처럼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기를 소원한다. 스스로 마을길을 고르고 치우던 어린 종은 동네 어른들로부터 칭찬받는 효자였다.
(2) 그리스도를 만나 민족을 구원하기로 결단한 소명기(召命期)
잘 먹지 못하고 자라 영양실조였던 종은 폐결핵에 걸렸다. 18살 고등학생이었던 종은 각혈을 쏟고 쓰러졌으나 병원 치료는 고사하고 약조차 쓸 수 없었다. 폐결핵 3기의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은 종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친구를 따라 상서교회에 나갔고 예수를 영접하였다. 이후 6개월 새벽기도를 다니는 동안 종에게 하나님의 치유가 임했다. “나 이제 생명 있음은 주님의 은혜라 저 사망 권세 이기니 큰 기쁨 넘치네.” 이 찬송은 종의 신앙인생의 주제가가 되었다. 그 은혜를 감사해서 주의 종이 되기를 서원하였고 군 복무를 마치고 1961년 선지학교에 지원한다.
오직 민족을 생각나게 하는 한국이라는 이름에 이끌려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한 종은 여기서 목회인생의 요람기를 지낸다. 신학교에서 종은 사랑하는 민족을 복음으로 구원하는 영성을 가다듬었으며, 그의 일생을 이끌어간 별세신앙의 신비에 눈뜬다. 어느 한 날 수업 시간 중에 성령께서는 그에게 물으셨다. “무엇을 배우느냐?” “신학입니다.” “신학이 무엇이냐?”
“하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하나님을 배우느냐?” “교수님입니다.” “신학은 교수에게 배우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배우라.” “어떻게 배웁니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 인간의 학문을 넘어 진정으로 하나님을 배우는 길은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매는 데 있음을 깨달았다. 이후 종은 그리스도를 연모하여 그리스도와 하나 되고자 하는 열망으로 살았다. 이 깨달음은 목회사역 가운데서 별세신앙으로 발아(發芽)한다.(3) 오직 예수 오직 교회로 달려간 사역기(使役期)
종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1965년 고부교회에서 부르심을 받았다. 종은 동학혁명의 발원지 고부에서 동학이 이루지 못한 구원의 역사를 서학인 복음으로 이룰 것을 감동받았다. 신학교 시절 주님에 대한 사랑을 눈물로 찬송하던 종의 고백은 주의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전도의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고부는 물론 그로부터 이십 리 떨어진 이평교회까지 두 곳을 뛰어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새벽기도를 알리는 종 줄을 당길 때마다 잃어버린 양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의 심장이 느껴져 종은 날마다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종은 예수 십자가의 도를 전하여도 받아들이지 않은 영혼이 불쌍하여 전도할 때마다 눈물 흘렸다. 그리하여 수많은 영혼들이 주께로 돌아왔다. 고부교회를 5년 여 섬겼는데 교인은 금방 10명에서 100명으로 열 배로 불어났고 부흥은 계속되었다.
종은 1969년 옥구교회의 청빙을 받아 군산지역으로 옮긴다. 성도들 간의 오랜 갈등이 끊이지 않았던 그 교회는 종의 기도와 열정적인 헌신을 통해 사랑의 공동체로 변화되었다. 그리고 전도의 불길이 타올랐다. 성도들과 함께 복음을 들고 온 지역사회를 가가호호 누비고 다녔기에 종의 별명은 호적계장이었다. 몸을 던져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는 종에게 교인들도 지극한 사랑으로 화답한다. 종은 그 시절 교인들로부터 받은 사랑을 “살을 깎아 드려도 아까운 게 없을 것” 같은 정으로 기억한다. 옥구에서 교인들과 목자 사이의 정이 얼마나 깊었던지 종은 옥구교회를 사임하고 떠날 때 심정을 이렇게 고백했다. “나도 울고 교인들도 울고 하늘과 땅도 울었다.”
1975년 종은 서울로 올라와 관악교회에 부임하였다. 종의 목회인생에서 외적으로는 모진 시련을 겪은 곳이 관악이었으나,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가장 깊은 은혜를 체험하였다. 도시 목회를 처음 시작한 종은 의욕적으로 설교하고 전도하였다. 교회는 이내 배가로 부흥되었으나 기존 교인들이 목회지도력에 반발하며 갈등이 생겼다. 종은 당회장권을 박탈당하고 설교단에서 끌려 내려오는 수모를 겪다가 1977년 초 이른 겨울 찬바람 속에서 교회에서 빈손으로 쫓겨났다. 극심한 고난은 하나님이 예정하신 종의 인생 최저점이었다. 종은 청계산 기도원에 들어가 무작정 하나님께만 매달렸고, 하나님은 한신교회 개척의 비전을 주셨다. 환상으로 펼쳐진 말씀 “요셉은 무성한 가지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는 창세기 49장 22절이 한신교회 개척의 비전이 되었다. 사람이 끝난 자리에서 하나님이 친히 일하기 시작하신다.
02 한신교회에서의 별세사역
(1) 샘 곁에 심겨진 무성한 가지 - 한신교회의 목회사역
한신교회는 무성한 가지의 비전을 따라 1977년 6월 5일 신반포의 한 놀이터에서 창립되었다. 고작 보증금 백만 원에 월세 14만원으로 작은 아파트를 얻어 예배처소로 삼았지만 비전은 원대하였다. 한국민족신자화! 1차는 강남, 2차는 한국, 3차는 세계. 종이 맨손으로 시작한 교회 위에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셨다. 종은 막 입주하기 시작한 아파트를 일일이 방문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듣는 이들마다 예수를 영접하였고, 주일이 되자 이들은 아파트에 마련된 예배처로 모여들었다. 이내 70명이 넘어 예배는 2부로 드리게 되어 작은 상가를 얻었고, 다시 아파트 네 곳을 얻어 다락방교회로 뻗어나갔다. 그것이 합쳐져 현재의 서울성전 건물로 옮기게 되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종이 눈물 뿌리며 목숨 걸고 드린 기도의 응답이었다. 종의 발이 부르트는 전도와 진액을 짜는 준비로 피를 토하듯 선포한 말씀의 열매이기도 하다. 종은 가난한 집안의 사랑많은 어머니의 심정으로 목회하였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으면 잘 먹고 살 것을, 가난한 부모 만나 배곯고 사는구나!”라고 독백한 그 어머니의 심정으로 양떼들을 말씀으로 섬겼다. “능력 있는 목사 만났으면 영적으로 배부르게 살 것을 못난 목사 만나 굶주리고 사는구나!” 이것이 종의 고백이었다. 토요일 밤 늦게까지 쑥을 뜯고 산나물을 캐어 말리며, 빈 땅을 찾아 콩을 심어 쉴 사이 없이 겨울 양식을 준비하던 어머니의 심정으로 한 편 한 편 설교준비에 목숨을 걸었다. 주의 일을 하는 것이 곧 행복이라며 종은 개척 이후 28년을 한 번의 안식년도 없이 뛰고 달렸다. 1980년에 한 번, 1987년에 한 번 그리고 2004년도 8월에 한 번 한신교회를 목회하는 중에 세 번을 쓰러졌다. 이로서 옥구시절까지 합하면 4번이나 사경을 헤맨 것이다. 종은 이를 일컬어 별세사수(別世四修)라 한다. 쓰러질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배운 까닭이다.
(2) 한국민족을 구원하는 별세의 비전 - 한국민족신자화 사역
종의 목회사역은 지역교회 울타리 안에 갇혀있지 않았다. 한신교회는 한국민족신자화를 위한 교회였다. 종은 가까이로는 강남지역 전도에도 최선을 다하면서 자신과 섬기는 교회를 한국민족 구원의 도구로 바쳤다. 한국민족신자화의 비전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 목표는 100교회 개척으로 설정되었다. 28년 한신교회 목회에서 모두 60여 교회가 개척되었다. 많은 지역교회들이 자기교회의 부흥과 유익을 앞세울 때 종은 힘에 부칠 정도로 한국민족신자화를 위한 교회개척에 진력한다. 한국민족신자화를 위한 종의 사역은 별세목회연구원으로 집약된다. 종은 20여년 전 지금은 별세목회연구원이 된 한신목회개발원을 열고 19회에 걸친 전국목회자세미나와 여러 차례에 걸친 전국사모세미나, 기장목회자세미나 등을 개최하였다. 전국의 목회자와 사모들의 영성을 깨우고 지성을 살찌우며, 심성을 치유하였다. 종은 세미나 사역을 한국교회를 살려내서 한국민족을 구원하는 가장 효과적인 길로 믿고 매년 최선을 다하였다. 해마다 2,000여명씩 수만 명의 목회자들이 종으로부터 새벽마다 새 힘을 얻었다. 종은 최근 별세목회연구원 사역을 통해 별세신학을 정립하고 별세목회를 프로그램화하여 계간 “별세의 삶”과 별세목회아카데미를 통해 전국 목회자들과 줄기차게 나누고 있다. 종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한국민족신자화의 비전은 1997년 분당 민족성전의 완공과 함께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3) 국경을 넘는 생명의 선교 - 별세를 창조하는 살림 사역
요셉의 무성한 가지처럼 담을 넘었다. 목회일생을 통해 깨달은 별세신앙의 신비를 들고 종은 교단의 울타리를 넘고 국경의 한계를 돌파하며 세상으로 나아갔다. 이르는 곳곳마다 십자가의 예수와 함께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별세신앙의 진리를 널리널리 전파하였다. 별세신앙의 신비는 회개와 치유, 부흥과 결단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다. 세상을 살리는 종의 사역은 국적과 계층을 넘어 소외된 이웃을 향한다. 종은 사역의 지경을 넓혀 안산에 가출청소년들을 살리는 별세의 가정사역을 시작하였다. 한신예수가정, 안산청소년쉼터, 들꽃피는학교 등은 종이 한신의 성도들과 함께 섬겨온 청소년 살림사역이다. 종은 또한 국내에 체류하는 외국인노동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기 위해 진력한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그 어떤 질병조차 치료받을 수 없는 외국인노동자들을 살려내기 위하여 외국인노동자전용병원을 설립하였으며, 이 땅에 와 예수를 처음 믿게 된 이슬람권, 힌두 불교권, 공산주의권 그리스도인들을 목회자로 훈련시켜 선교사로 역파송하는 세계선교신학대학 사역에 힘을 쏟는다. 강남과 한국민족을 넘어 세계를 살리는 하나님의 비전이 종과 종이 세운 한신교회를 통해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
03 별세의 신앙과 신학
(1) 별세신앙
이 모든 사역의 중심에는 별세신앙이 있다. 종의 신앙적 확신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는 사도 바울의 고백에 담겨있다. 많은 교회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는 신앙의 도리와 복 받는 기복주의 신앙에 머물러 있을 때, 종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십자가의 예수와 함께 자기도 이미 죽었음을 고백하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으로 살아갈 것을 외치고 가르쳤다. 별세신앙은 죽음 이후로 유보된 천국의 삶을 이 땅으로 끌어내렸다. 종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별세신앙으로 성도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에 이르고, 이 땅에서 지극한 행복을 누리며, 세상을 살리는 창조적 존재가 되도록 이끌었다. 종이 제기한 별세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최고의 진리요 사도 바울이 정립한 그리스도인의 신앙으로서 세계 모든 교회가 견지해야 할 신앙적 지향임이 분명하다.
(2) 별세의 인격과 삶
별세신앙은 종의 인격 및 삶과 분리될 수 없다. 종은 처녀목회지 고부와 옥구에서 성자형 목회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주린 자를 만나면 사재를 털어주었고, 두 벌 이불은 가난한 자와 나누어 덮었다. 병든 자를 생각하면 사과 한 알을 목으로 넘기지 못했고, 거지를 만나서는 옷을 벗어주었다. 지역주민과 함께 호미를 들고 밭을 매고 똥지게를 대신 져주면서 복음을 전했다. 먼저 팔을 걷어 교회당을 쓸고 닦았으며, 마을 길가의 풀을 뽑고 길을 내었다. 종은 옥구교회를 떠날 때 받은 퇴직금을 그대로 하나님께 바쳐, 두고 온 마을에 오늘의 어은교회를 탄생시켰다. 전국 방방곡곡, 세계 곳곳으로 다니면서 별세의 복음을 전했지만 모든 사례비는 사유화하지 않고 전액 교회에 바쳤다. 종은 받는 것보다 바치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다. 별세는 종의 영성이자 인격이요 삶이다.
(3) 별세의 신학과 목회
종에게는 수많은 저술이 있다. “광야의 기적”으로부터 “사람답게 살자”에 이르는 17권의 설교집, “별세의 지도자”와 “별세의 목회”를 필두로 별세의 삶에 관한 12권의 저서, “하늘을 품은 마음”으로 대표되는 4권의 별세칼럼, 그리고 20여년 진행되어온 전국목회자세미나의 생생한 감동을 담은 “교회가 살아야 민족이 산다”를 비롯한 17권의 공저 등 수많은 저서를 출판하여 교회의 정신문화를 풍부하게 하였다. 일생의 자전적 고백록 “나는 매일 죽는다”, 담관암 수술 이후 병상에서 받은 은혜를 담은 “나는 죽어도 행복합니다”, 별세신앙을 신학적으로 체계화한 “별세신학”, 별세신앙을 제자훈련교재로 편찬한 “별세신앙지도자과정”외에도 수많은 저술과 기고문들이 있다. 종은 목회와 신학을 통일하여 한국교회에 별세신학과 목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계시된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이의 불가분리성과 연속성을 별세로 파악한 종은 이 관점을 성서와 신학 전반에 적용하여 별세신학을 체계화하였다. 별세신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사이의 별세적 관계에 의한 공동체의 진리로 이해하고, 최초의 가정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 파악하며, 교회가 별세의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인 별세를 회복하는 것을 목회로 파악한다. 종이 제기한 별세의 신학과 목회는 목회자들은 물론 신학계에 놀라운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