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상대담 녹취

  • 대담자 : 이강석 목사
  • 일시 : 2005. 06. 11 PM 3:30 ~ 4:30
  • 장소 : 서울아산병원 동관 1833호실
  • 01 병상소감

    이강석

    목사님, 반복되는 입원과 수술로 많이 힘드시죠? 목사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들을 위하여 대담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巨智

    많이 아픕니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의사는 말기 암으로 진단합니다. 내가 생각해도 소생할 전망은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강석

    평생 같은 부위를 네 번씩 수술하시고, 작년 8월 담관암 수술을 마치고서 올해 5월 말에 다시 입원하여 암 말기라는 고통의 터널을 지나고 계십니다. 목사님께서는 이 같은 고통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계십니까?

    巨智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무병장수(無病長壽)의 사람이요, 또 하나는 유병고통(有病苦痛)의 사람입니다. 나는 유병고통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보통 병을 앓고 고통을 겪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하나님도 나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그 은혜로 병도 주셨다고 믿습니다. 나는 이 고통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받고 있습니다.

    이강석

    인간적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 고백을 하실 수 있는지 목사님의 마음을 알고 싶습니다.

    巨智

    나는 지금까지 별세를 외치고 널리 펼쳐왔습니다. 그런데 별세를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몸으로 이룰 때가 온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예수님의 별세를 몸으로 겪고, 그 체감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비를 완전히 깨닫게 은혜를 베풀고 계시는 것이죠. 예수님이 별세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죽을 때의 고통이 선행하였고, 부활의 기쁨은 십자가의 고통을 전제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전한 것은 신앙으로서의 별세였습니다. 신앙으로서의 별세는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믿고, 내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고백한 신앙의 경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죽는 죽음은 또한 동시에 날마다 사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죽음의 과정은 매일매일 죽는 것이 아니요 따라서 매일매일 살아나는 신앙으로서의 고백만이 아닙니다. 마지막 숨을 거두는 종말의 죽음으로 나아가고 있고, 이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임할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 필수적인 과정으로서의 고통입니다. 이 종말적 고통 속에서 나는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부활할 것을 진정으로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이 세상에서의 최종적 은혜로서 이 병상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지요.

    이강석

    건강하실 때나 병상에 누우신 때나 오직 별세 생각뿐이시군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과 죽음이 다가올 때 인간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살려달라고 울부짖기도 하는데요?

    巨智

    오직 별세 생각으로 일관하는 거지.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물론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렇게 몇 차례씩 쓰러뜨리고 죽어가는 고통 속으로 몰아넣으실까 묻지 않는 것은 아니지요. 이 세상에 죄 많은 사람도 많고 악한 사람도 많고 위선자도 많은데 왜 일관되게 주의 일을 위해서 살아온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지? 그러나 그런 생각이 드는 즉시 성령께서 곧바로 감동을 주십니다. “종아, 너는 내 사랑하는 종이기 때문에 특별한 은혜를 내린다. 별세의 은혜다. 이 종말적 고통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별세의 은혜를 받을 수 없다.” 그러니 어쩔 수 없지. 은혜로 받을 수밖에.

    이강석

    목사님, 병상에서 별세에 관한 묵상 외에 다른 생각은 해보시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67년 살아온 생애 속의 특별한 사건을 회상하신다든지, 고마운 사람이 떠오른다든지요?

    巨智

    물론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고마운 사람들이 많지요. 그러나 병상에서는 주님 생각이 더욱 간절합니다. “주님이 나를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나?” 꼭 한 사람 생각하자면 우리 식구지.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별세의 은혜를 내게 베풀어주시기 위하여, 내가 받을 고통을 우리 식구까지 운명적으로 나와 함께 겪게 하는 것이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지.

    이강석

    아무래도 일생의 반려자요 동역자인 사모님이 마음에 걸리시는군요. 목사님, 병상에서 그 아픈 마음을 위로하고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巨智

    나에게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말씀이겠지요. 이 말씀 외에 아침 저녁으로 시편 23편과 51편도 암송하고 묵상합니다. 잠들고 깰 때마다 죄를 회개하고 목자 되신 주님께 감사하면서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할 소망을 찬양하는 것이지요.

    이강석

    목사님! 아무리 말기 암이라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뢰하고 기적을 기대하면서 생의 희망을 가지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

    巨智

    다들 나를 위하는 마음으로 살려는 기도를 하라 하는데, 내 마음속에는 기어코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없어요. 그러면 나보고 낙심하지 말라고 하는데, 내가 낙심을 해서 그런 게 아니예요. 나에게는 도리어 분명한 희망이 있습니다. 땅에 사는 것만이 희망이 아닙니다. 주께 가는 것이 참 희망이예요. 그런 점에서 나는 강하다고 생각해요. 강하기 때문에 주께 가려는 것이거든. 사람들이 나를 보는 것하고, 내가 나 자신을 보는 것 하고 그 측면이 달라요. 나는 주께로 가야한다, 빨리 가야한다. 살아서 내가 주의 일을 더 마무리하고 사역을 더 펼칠 수 있는 길도 있겠지만, 어느 편이 주님께서 나를 생각해주시는 걸까 할 때, 주께서 데려가는 것에 더 생각이 깊습니다.

    이강석

    목사님, 그런 말씀에 저희 후학들로서는 서운한 생각이 듭니다. 한신교회 성도는 물론이고 한국교회에 목사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후배들은 목사님께서 건강을 되찾으셔서, 계속해서 한국교회를 위해서 별세의 영성과 신앙으로 교회를 깨우고 우리 민족을 살리는데 기여하시기만을 소원하고 있습니다.

    巨智

    그런 생각도 해봤는데, 내가 다시 건강을 회복해서 강단에 서는 것은 기적 중에 기적이야. 내가 이제 일체 먹지를 못하니까. 먹지 못하면 살지 못하는 것이고.

    이강석

    목사님, 그래도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기적을 기대하며 힘내시기를 원합니다.

    巨智

    기적을 기대하지. 그러나 그 기적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예요. 하나님이 나를 데려가셨다가 예수님 재림하실 때 부활생명으로 함께 오는 것이 기적이지. 나는 그 기적을 확신하고 기대합니다.

  • 02 인생회상(人生回想)

    이강석

    종말을 의식하면서 병상에 누워 계시면 지나온 인생이 어느 때보다 깊이 회고되리라 생각합니다. 목사님은 일생의 최저점을 지난 때를 언제로 기억하십니까?

    巨智

    나의 인생은 목회 40년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인생과 목회 최대의 위기는 관악교회 사건입니다. 시골에서 목회하다가 서울에 처음 부임해서 의욕적으로 목회를 하다가 큰 어려움을 만났습니다. 성도들의 전임자에 대한 우정 어린 관계를 충분히 배려하지 못했고, 목회의 지도력을 성급하게 확립하려다가 반발을 샀습니다. 급기야 노회로부터 당회장권을 박탈당하고 강단에서 끌려 내려오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사택으로는 돌이 날아와 유리창이 깨지고, 고무신으로 뺨을 맞기까지 하였습니다. 급기야 교회로부터 쫓겨났고, 무작정 청계산 기도원에 들어가 하나님께만 매달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위기 가운데 인간적으로는 우리 식구가 끝까지 나와 함께 하면서 격려해주었지만,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와 섭리가 아니었으면 견디어낼 수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때가 인생의 최저점(最低点)으로 기억되는데, 생각하면 그 저점은 내가 만든 결과일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이끌어 가신 저점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최저점을 지나온 것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강석

    가장 좌절했던 순간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수용하시는 것이 목사님의 영성적 강점이신 것 같습니다.

    巨智

    그 때 내가 인간적으로 말하면 참 절망적이지. 그러나 인간이 절망할 그 때가 하나님께서 다시 소생케 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전환점입니다. 어린 시절 가난해서 학교에 갈 때 도시락을 싸 갈 수 없어서 점심시간이 되면 물로 배를 채우고 누워서 그저 하늘만 바라보았습니다. 그 때 하늘이 내 가슴에 들어와 하늘을 품는 은혜를 받았지요. 사람이 할 수 없는 그 때 하나님께서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관악교회에서의 모진 시련은 사람이 끝났을 때 하나님이 시작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체험하게 해주었습니다. 청계산에서 내 인생이 살아남은 것이 기적 같은 일이요,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은혜입니다.

    이강석

    꼭 목회자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목사님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은 어떤 때이십니까?

    巨智

    행복? 순간순간이 다 행복이지. 돌아보면 전 생애가 행복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인생을 온통 행복하게 해주지. 주님 사랑을 생각하면 눈물이 땅을 적십니다. 어느 한 순간도 주님 사랑을 받지 않은 때가 없고, 또 주님을 사랑하며 살았으니까요. 또 목사로서 행복한 순간은 강단을 눈물로 적시며 말씀을 전하면서 교인들과 함께 천국에 올라가는 기분을 누릴 때입니다. 그렇지만 사적인 행복을 말하라면 우리 식구와 함께 가졌던 시간입니다. 우리 식구는 일생 동안 날 위해 살았습니다. 하늘이 보낸 천사지요. 우리 식구하고 둘이 나란히 침상에 누워 그 옛날 고부시절부터 목회여정을 회상하면서 함께 눈물을 흘리며 침대 위를 적시고, 그 눈물을 닦아주던 때가 인간적으로 행복을 누린 순간 같아요. 과거를 회상하면서 미안하다고 사과도 하고, 손을 잡아주던 것이 제일 행복한 순간으로 기억납니다.

    이강석

    목사님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 한 가지를 말씀하신다면 어떤 것입니까?

    巨智

    말할 것도 없이 별세를 깨달은 것입니다. 별세를 안 것이 내 인생의 최대 영광이요 행복이자 보람입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슬아슬합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나를 사랑하셔서 이 진리를 알게 해주셨을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불가분리성과 연속성의 신비를 별세라는 성경 속의 한 단어를 통해 깨닫게 하시고, 그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볼 때 신비한 하나님의 세계가 안개가 걷힌 듯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누가 무어라고 해도 예수 별세의 진리를 알고 별세신앙의 신비를 안 것이 내 인생 최대의 사건입니다.

    이강석

    목사님은 평상시에 살아온 인생에 대하여 후회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살아온 인생 속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고 하면 어떤 것입니까?

    巨智

    성격상 친절하게 남에게 대하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사교적이지도 않은데다 몸이 많이 약했습니다. 바쁜 사역 속에서 지친 몸으로 성도의 이야기를 자상하게 귀 기울일 여력이 없었습니다. 특별히 장로님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장로교회인데, 장로님들을 세심하게 챙겨드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목회 사역을 장로님들과 함께 깊이 상의하고 추진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아 회의를 자주 할 수도 없고 오래 회의하는 것은 너무도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본심은 그렇지 않음에도 사역을 혼자 하는 것처럼 보인 것, 이것이 장로교 목사로서 정말 미안한 것입니다. 몸이 지쳐 있으니까 미안하다 미안하다 하면서도 못하였습니다. 그래도 별다른 불평도 없이 목회사역에 협조하면서 따라와 준 장로님들에게 고마운 마음이지요. 그저 부족한 종을 잘 이해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강석

    목사님, 가족이나 형제들과의 관계에선 어떻습니까?

    巨智

    하나님께서 많은 축복을 주셔서, 세상적으로 보면 형제들 중에서는 그래도 잘 된 셈인데 형제들에게 충분한 의지처가 되어주지 못한 것이 아쉽다면 아쉬운 점입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형제들에게도 잘 표현할 줄을 모르고 살아온 것 같아요. 그저 하나님의 은혜를 기도할 뿐이지.

  • 03 신학과 목회여정의 반추(反芻)

    이강석

    목사님의 목회사역은 이제 40여 성상을 헤아립니다. 신학수업의 시간까지 합한다면 44년의 긴 세월입니다. 이제 신학과 목회사역에 대하여 반추해보았으면 합니다. 목사님의 40년 목회사역에서 가장 역점을 두신 것은 어떤 점입니까?

    巨智

    오직 예수, 오직 교회라는 정신뿐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미친 듯이 교회를 섬기겠다는 열정은 있었지만, 사실 방법론을 잘 몰랐어요. 목회방법론에 대하여 특별히 배운 것도 없었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눈물 뿌리며 기도하고 설교하고 전도하며 산 것이지요. 그저 예수에 미쳐 산 것일 뿐 사역방법론 상으로 어디에 역점을 두었다 말 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있다면 오직 예수 오직 교회의 마음뿐입니다.

    이강석

    목회여정을 따라 각 시기별로 한 번 반추해보았으면 합니다. 먼저 신학교 시절부터 회상해주시지요.

    巨智

    신학교 시절 나는 한신인이라는 큰 자부심을 가지고 신학을 했습니다. 물론 지나치리만큼 비평적인 눈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든지 서구로부터 첨단 신학이 여과 없이 흘러들어오는 것에 대하여 받았던 충격이 컸지요. 그러나 한신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이중표는 없었을 것입니다. 한신은 내 목회인생의 요람으로서 생각하면 고마운 학교입니다. 민족을 생각나게 하는 “한국”이라는 이름 때문에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하여 민족을 사랑하고 구원하는 영성을 가다듬었습니다. 별세신앙의 신비를 눈뜬 것도 신학교 시절이었습니다. 인간의 학문으로서의 신학을 넘어 하나님을 배우는 성경적 길이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것임을 깨달은 것도 수유리 선지동산이었으니까요(마 11:29). 학과 점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진 못했지만, 주님의 마음을 감동해서 주님의 점수는 많이 땄다고 자부합니다. 삼양동 버스 종점에서 수유리 학교까지 걷는 밤길은 주님과 함께 울고 웃으며 함께 노래하는 데이트 시간이었으니까요.

    이강석

    목사님의 목회 심정은 목사님의 별세칼럼 2집 “눈물을 먹은 마음”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각 시기마다 흘린 눈물을 말씀하여 주시지요.

    巨智

    고부에서 전도사로서 목회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저녁마다 예수에 미쳐서 울고 기도하고 전도하며 살았습니다. 첫 목회임지가 동학혁명의 발원지 고부였던 것을 저는 특별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동학이 이루지 못한 구원을 서학인 복음으로 이루리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 전도하여도 받아들이지 않는 영혼은 얼마나 불쌍한지 눈물이 절로 흘러나왔습니다. 새벽기도를 알리며 종 줄을 당길 때도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고부 목회시절, 영혼을 구원코자 하는 주님의 마음을 품게 해주시고, 그 마음으로 끊임없이 눈물을 흘려주신 주님의 은혜가 감사합니다.

    이강석

    두 번째 임지 옥구교회에서는요?

    巨智

    옥구교회는 교인들과 함께 첫 정을 나눈 눈물로 기억됩니다. 옥구교회를 회상하면 내게도 참 정이 많다, 그런 느낌을 갖게 됩니다. 옥구교회에 쏟은 정이 얼마나 컸던지, 또 옥구교회 교인들로부터 받은 정도 참으로 컸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옥구를 떠나 서울로 올라 올 때 너무도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내 안에 그렇게 눈물이 많은지 처음 알았습니다. 교인들과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었습니다. 마치 자식을 잃은 어머니 심정으로 눈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생각하면 지금도 기가 막혀요. 양을 두고 떠날 때 목자의 심정이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는 지 실감을 했어요. 가슴이 쓰리고 아팠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이별하는 목회를 하지 말자 생각했지요. 청빙을 받아 이리저리 돌아다니지 말고, 내 생명을 바쳐서 하나에 쏟아버리고 말아야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튼 옥구교회는 교인들로부터 받은 사랑도 지극히 크고 내 자신이 쏟아 넣은 정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곳입니다.

    이강석

    목회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관악교회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하셨습니다만.

    巨智

    관악의 목회에서도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시련을 겪는 것도 목회요 그 과정에서 별세의 신비를 몸소 체험할 수 있었으니까 하나님으로부터 큰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인력으로는 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절대적 예정과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관악은 나를 청계산 기도의 자리로 보내주었습니다. 6개월 동안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기도할 시간을 얻었으니 돌아보면 얼마나 감사합니까?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창 49:22). 거기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매달릴 때 하나님은 개척의 비전을 보여주시고 요셉의 약속처럼 무성한 가지의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환상대로 한신교회가 창립되었고, 무성한 가지로 뻗어 한국교회와 세계를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강석

    한신교회는 목사님이 친히 개척하시고 창립하셔서 섬겨온 교회입니다. 남다른 애정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요.

    巨智

    한신교회를 개척할 당시 인간적으로 볼 때는 앞이 캄캄하고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세워진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한 개척의 목회열정에 함께 해준 교인들이 감사합니다. 그러나 한신교회 개척을 말하려면 우리식구 얘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번에 입원하여 있으면서 개척 당시 얘기를 아내에게 들으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아파트를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전도할 때 쓰러질 듯 쓰러질 듯 다리는 휘청거리고, 갈증으로 목이 말라서 고통스럽던 그런 어려운 고비 고비를 넘었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여보 나는 무정한 사람이야 하면서 울었습니다. 개척자의 아내가 되어서 그 고생을 다했는데 그 마음도 채 알아주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목사인 나야 고생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지만, 어쩌다가 목회자의 아내가 되어 그 고생을 하게 했나 생각하면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어떤 경우에도 담대하게 나를 위해 기도해주고, 그 누구 하나도 결단코 원망하지 않으면서 지금껏 살아준 아내가 고맙습니다. 그리고 그 아내에게 더 이상 그 무엇도 해줄 수 없다고 생각하니 너무 미안합니다.

    이강석

    한신교회 개척은 사양하시는 목사님을 사모님이 강권하심으로 시작되었다고 늘 말씀하셨죠?

    巨智

    한신교회는 우리 식구의 개척정신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나는 못해,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나는 적극성도 부족하고 겁이 많은 사람입니다. 자신감도 없고 추진력도 부족한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 식구와 한 몸으로 지어주셔서, 아내에게 붙들려 교회 개척을 해냈습니다. 우리 식구는 그 배후에서 개척사역의 고통을 혼자 감내하면서 최선을 다 해 주었습니다. 오죽하면 한신교회를 있게 한 우리 식구를 향하여 절해주고 싶은 마음이겠어요.

    이강석

    한신교회 교인들의 마음도 목사님과 같은 마음일 줄 압니다. 계속해서 사모님을 아끼고 사랑해주실 것입니다. 안심하시지요, 목사님. 한신교회를 개척하시고 강력하게 부흥할 때를 한 번 회상해주시지요. 행복한 때를 기억하면 치유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巨智

    행복도 행복이지만, 한신교회 부흥기에는 사역이 늘 힘에 부쳤습니다. 생각하면 나의 목회 사역은 일생 동안 헐떡거리며 산 인생 같아요. 고부에서도 두 교회를 목회하면서 헐떡였습니다. 고부 한 곳만 목회한 것이 아니라 거기서 20여리 떨어진 이평에 있는 교회도 목회자가 없어서 주일이면 두 곳을 헐떡이며 뛰어다녔습니다. 옥구에서도 동네방네 다 뛰어다니며 전도를 하고 다녔기 때문에 호적계장이란 별명까지 얻었습니다. 하루 종일 온 마을을 다 뛰어다니다 보면 집에 돌아와 방에 누워 숨을 헐떡였습니다. 한신교회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신 1차 아파트 4동을 얻어서 개척할 때에는 너무 뛰고 달려서 몸이 지쳤습니다. 스스로 모습을 생각할 때,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간다, 그렇게까지 생각되었습니다. 교인들이 몰려와서 설교를 몇 번씩 하고 나면 체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집에 돌아가면 죽은 듯이 누워 있곤 하였습니다. 우리 식구는 나를 방에 밀어넣고 문을 잠그고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대로 가면 쓰러질 것 같으니까, 조금이라도 쉬게 해주려는 것이지요. 그렇게 일생을 헐떡거리면서 살아왔습니다. 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고 주님께 사로잡혔기 때문에 그렇게 뛰고 달려온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부흥이 되어 1980년에 지금 교회 있는 건물로 들어오던 해에 그만 쓰러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도 헐떡거리면서 뛰고 달리다가 7년 후인 1987년에 세 번째 쓰러졌지요.

    이강석

    그렇게 헐떡이면서 뛰고 달리신 결과 목사님 목회에 열매가 맺은 것 아니겠습니까? 목사님의 한신교회 목회에서 중요한 열매는 두 가지로 생각합니다. 외적, 양적으로는 민족성전의 건축이요, 내적이고 영적인 면으로는 별세신학의 정립이라고 보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巨智

    나는 본래 계획이 없는 사람입니다. 내가 계획을 세우고 조직적으로 추진해서 된 일이 별로 없습니다. 스스로 하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나를 이끌어 가셨습니다. 민족성전 짓는 것도 무슨 계획이 있어서 된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추진해 가신 일입니다. 나는 민족성전을 생각할 때 마치 느보 산 산마루 위에 선 모세의 심정입니다(신 34:1-6). 모세는 40년 광야교회를 이끈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는 광야의 고통 속에서 불평하고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더불어가나안을 향하여 최선을 다했습니다. 느보산에 올라 가나안 광야가 한 눈에 들어오는 순간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여기까지라고 선언해주셨습니다. 느보 산은 모세에게 별세의 산이 되었습니다. 이제 민족성전이 부흥되어 별세신학으로 민족을 살려내는 재도약의 역사가 펼쳐질 것입니다. 민족성전에서 목회하는 사람은 참으로 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을 가지고, 내가 없더라도 같이 별세목회의 사역에 동사하는 심정으로 임해줄 것을 기대하고 기도합니다.

  • 04 별세신학 & 별세목회

    이강석

    이제 별세신학과 별세목회에 대해서 하실 말씀을 나주어주시지요. 병상에서 특별히 새롭게 감동되는 별세의 의미, 별세신앙의 은혜는 어떤 것입니까?

    巨智

    모두에서 말한 대로, 지금까지 별세를 3 수(修)하면서 받은 별세의 은혜는 매일매일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은혜요 매일매일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생명으로 사는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이번 별세의 4 수는 일생 살면서 딱 한 번 있는 종말적 수련입니다. 나는 이제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있을 영원한 부활을 기대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동참하는 심정입니다. 옆구리에 구멍이 뚫리고 호스가 박힐 때 나는 십자가 위에서 창에 찔린 예수님의 옆구리를 묵상합니다.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분명히 느끼고 있습니다. 이제 다가오는 죽음으로 행복하게 걸어 들어갈 것입니다. 이 생을 떠나는 것이 섭섭하다든지, 죽는 것이 원망스럽다든지 그런 말은 입에 한 마디도 올릴 생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그 생명을 취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 부족한 종을 사랑하셔서 나의 영혼을 거두어 가시니까, 예수님과 함께 신천신지에서 부활생명으로 깨어날 것을 기대하면서 당당하게 걸어갈 뿐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인간으로서의 생명을 아낌없이 다 비우실 때에 사흘 만에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셨으니까, 별세신앙의 믿음을 고백하면서 기쁨으로 영원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지.

    이강석

    목사님, 너무 비장하게 말씀하시니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별세목회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는 어떠하십니까? 일관되게 예수 별세를 설교하시고, 별세신앙을 가르치시면서 별세의 삶을 살 것을 선포하셨는데 얼마만큼 보람을 거두셨다고 보십니까?

    巨智

    하나님이 나에게 하늘의 뜻을 감동받도록 영감을 풍성하게 부어주시고, 부르짖어 외칠 수 있는 선포의 열정은 넘치도록 주셨지만 받지 못한 은혜가 있습니다. 내가 원래 비조직적이고 세심하게 앉아서 가르치고 점검하는 은사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별세신앙은 선포하고 끝날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삶 속에서 가르쳐서 제자화를 해야만 삶 속에서 열매를 거둘 사상입니다. 그런데 천성 때문에 내가 지닌 정력을 가르치는 데 집중하지를 못했습니다. 기질 상 혼자 깨닫고, 깨달은 것은 그저 외친 후에 교인들이 따라 올 것을 막연하게 기대하였을 뿐이지요. 물론 나의 외로운 외침에 공감해서 별세의 삶을 사는 이들이 따로 많이 있을 줄 압니다. 설교로 듣고, 책으로 읽고 별세신학과 목회에 공감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음을 최근에 실감하고 있으니까요. 앞으로도 다 책을 읽다 감동을 받고 그 뒤를 따를 이들이 많이 있을 것으로 소망하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내가 외친 별세사상의 열매를 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가시적인 효과를 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별세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가장 중심적인 하나님의 진리이기 때문에, 이 진리는 살아서 생명력을 가지고 한신교회를 살리고 한국교회를 깨우며 세계를 구원하는 능력을 나타낼 것으로 믿습니다.

    이강석

    목사님이 뿌린 별세신앙의 씨앗은 민들레처럼 퍼져서 한신교회는 물론 한국교회와 세계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풍성한 열매로 맺힐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별세목회를 추구해 오시면서 목사님 자신에게 아쉬운 점은 무엇입니까?

    巨智

    바로 방금 말한 대로입니다. 내가 혼자 깨닫고, 내가 혼자 살려고 애쓰고, 내가 홀로 강단에서 외치고, 그렇게 사역해온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최근에야 별세신학이 체계화되고 교인들을 훈련할 프로그램으로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병상에 눕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시간을 주신다면 별세의 제자화에 혼신의 힘을 기울일 것입니다. 이론적 이해를 넘어 사상적 공감대를 이루고 별세의 삶으로 함께 나아갈 것입니다. 교역자도 가르치고 교인들도 제자로 키워내는 일이 앞으로 꼭 이루어져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강석

    별세신학과 목회 그리고 별세의 영성은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하나님의 뜻이요, 또한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진리를 집약해서 신앙화해준 비전입니다. 이 천년 교회사는 좌우로 동요하면서 별세신앙을 중심으로 좌표를 찾아온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별세신앙으로 새롭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기에, 하나님께서는 목사님에게 그 사역을 담당할 새로운 기회를 주실 것을 믿습니다. 목사님, 힘을 내시지요. 그런데 별세신앙을 신학적으로 정립하는 일도 있고, 한신교회에 적용하는 일도 있고, 한국교회에 전파하는 교육사역도 있을텐데 목사님께서는 어떤 측면이 시급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巨智

    별세신학의 기본적 체계화는 이루었지만 별세신앙을 별세영성, 별세목회학, 별세인격 등으로 정리를 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2,000년 교회사 속에서 그리스도론에 대한 흐름을 연구하고 정리해서 별세의 그리스도론으로 정립할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면 감사하겠는데, 그렇지 못하다고 해도 낙심하지는 않습니다. 별세신학에 공감하는 많은 후진들이 나올 것으로 믿고, 원조(元祖)가 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후학들을 통해서도 이루실 수 있으니까요. 후학들을 위한 도움을 더 많이 남기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입니다.

    이강석

    목사님, 향후 별세신학이 한국교회와 신학계에 미칠 영항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巨智

    오늘날 대부분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거의 하나의 교단적 신학이요 교파를 위한 교리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별세신학은 철저히 예수님 중심의 신학이요, 예수님에게 있은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기본 패러다임으로 하여 성경 전체를 꿰뚫는 신학입니다. 이 눈을 통해서 성경을 보니까 성경 전체가 새롭게 열리는 것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모든 교단신학과 교파적 교리주의를 뛰어넘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별세신학은 각양 신학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신학들로 하여금 참 신학이 되도록 돕는 역할을 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앞으로 별세신학이 신학계에서도 학문적으로 검토되어 공감될 것은 공감되고 비판 받을 것은 비판 받으며 세계교회를 위한 신학으로 더욱 정립될 것을 기대합니다. 국내에서 뿐만이 아니라 별세신학이 국경을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별세신학을 연구하는 후학들이 외국 유수한 신학교에서 논문도 쓰고 강연도 함으로서 세계적으로 소개되었으면 합니다. 그 일에 힘이 되어주어야 하는데 아쉬울 뿐입니다.

    이강석

    목사님이 섬기시는 한신교회에서도 별세신학을 연구하여 세계적인 신학자들이 되는 후배들이 나오고, 한국교회에서도 목사님의 별세영성과 신학을 깊이 있게 연구하여 논문으로 발표하는 후학들이 많이 나올 것을 기대합니다.

    巨智

    그렇습니다. 내가 떠나더라도 별세목회연구원에서 그런 사업을 해야 하겠죠.

  • 05 한신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마음

    이강석

    이제 한신교회와 성도들에게도 하실 말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교인들이 밤낮으로 눈물 뿌리고 금식하면서 목사님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교인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은?

    巨智

    교인들에게 그저 감사하고 죄송하고 미안할 뿐이죠. 사랑을 많이 베풀어야 할 목사가 도리어 교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눈물 뿌리게 만들었으니 목자의 도리가 아닙니다. 목자로서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해서 교인들에게 부담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교인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물론 내가 사랑한다고 말을 해서 사랑하는 게 아니고, 교인들에게 뭐 친절히 말을 몇 마디 한다고 해서 교인들이 내 마음을 아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표현이 부족하고 말이 없다고 해도 교인들이 내 심정을 알고, 나도 우리 교인들의 심정을 압니다. 그러나 좀 더 사랑하지 못한 목자의 죄인 됨을 고백할 뿐입니다.

    이강석

    성도님들께 전하고 싶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巨智

    부족한 목자를 너무도 아껴준 것 고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별세의 설교를 은혜로 받아 준 것이 참으로 고마운 정으로 느낍니다. 디모데후서 4장 3-4절의 말씀처럼, 사람들은 바른 교훈을 잘 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려운 귀를 긁어줄 사욕을 채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입맛에 맞는 스승을 찾아 수많은 교회들을 순례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듣기보다 허탄한 성공신화와 비성경적 기복주의의 노예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신교회 성도들은 장로님들로부터 권사님, 집사님, 온 성도들에게 이르기까지 예수 별세의 진리를 복음으로 받고 별세신앙으로 자기 인격을 변화시키며 별세의 삶을 살자는 성경적 설교를 기쁨으로 받아주었습니다. 한신의 강단에서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껏 설교할 수 있었다는 것보다 우리 성도들에게 고마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줄 것을 기대하고 소원하며 병상에서도 기도를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별세의 설교를 듣고 배우는 것에서 더 나아가 별세의 인격을 이루고 별세의 삶을 사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서 더 많이 별세한 증거가 나와 한국교회에 모범을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것이 부족한 종을 사랑한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별세의 신앙을 실천하며 별세의 삶을 살아준 성도들에게는 평소에도 절해주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큰 곤경에 빠졌습니다. 권위주의에 빠졌어요. 성경은 별세의 진리만을 가르칩니다. 겸손하게 낮아지고, 자기를 비우고, 종처럼 섬기라고 주님은 가르치는데 오늘날 교회에서 주님의 가르침이 힘을 잃어가고 있어요. 이러한 때 우리 교회 장로님들이 별세 장로의 모범을 보인다면 얼마나 자랑스럽겠어요? 수많은 교회들에서 회의하고 결정하고 감독하는 일에만 사로잡혀 있을 때에도, 우리 교회 장로님들은 겸손하게 성도들을 섬기는 종이 되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수많은 교회들이 자기 교회만을 생각할 때, 한신의 성도들은 오직 주님만 생각하면서 어떻게 한국교회를 섬기고 한국민족을 살려낼 것인가 관심하는 별세의 공동체가 되는 비전을 꿈꿉니다.

    이강석

    목사님께서 다시 건강해지셔서 설교하신다면 무슨 말씀을 전하시고 싶으십니까?

    巨智

    말할 것도 없이 갈라디아서 2장20절을 본문으로 택할 것입니다. 제목은 “나를 사랑하는 길”입니다.

    이강석

    목사님은 앉으나 서나 별세신앙시군요. 결국 십자가의 예수님과 함께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며 살리는 길이고 복 받는 조건이라는 점을 말씀하시고 싶은 것이군요.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시 19:3-4) 하신 말씀처럼 그 말씀이 모든 교인들에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질 줄 믿습니다. 목사님, 목사님께서 제시한 우리 교회의 3대 비전은 영광스러운 교회, 행복한 교회, 세상을 살리는 창조적인 교회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세 비전 중에 앞으로 우리가 가장 힘을 쏟아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巨智

    세상을 살리는 일입니다. 영광도 누리고 행복한 것도 많이 찾아야겠지만 결국은 섬기고 살리는 일입니다. 한신교회가 세상을 많이 살려냈으면 합니다. 한국교회를 살리고, 한국민족을 살리고, 세계선교로 세상을 살려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밖을 향하여 살림의 손을 뻗으려면 먼저 교회 안에서 서로를 살려주어야 합니다. 교인들이 서로서로 살려주어야 합니다. 서로 인격을 살려주고, 서로 덕을 세워주고, 서로 인정해주면서 살리는 교회의 실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유사시에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이 없다면 주님 앞에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문제가 있을 때, 어려움이 올 때 교회 안에서 장로님들이 서로를 존중해주고, 목회자와 성도가, 성도와 성도가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 아끼고 서로 섬겨주어야 합니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살리는 교회 되는 것이 한신교회를 개척하고 별세의 목회를 실천해보려고 애썼던 이 종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 06 기장교단과 한국교회를 향하여

    이강석

    목사님은 한국기독교장로회 증경총회장이십니다. 목사님을 배출한 한신대학교와 기장 교단에 대하여 하시고 싶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巨智

    오늘의 이중표를 있게 한 것은 한국신학대학입니다. 누가 뭐래도 나는 나를 배출한 한신대학교를 아끼고 사랑합니다. 그런데 오늘 그 학교가 다른 신학교들에 비해 자꾸 쇠잔해가는 것은 아닌가, 우려가 들면서 마음이 아픕니다. 한신대학교와 기장 교단은 군사독재와 불의가 횡행하던 시절 선지자적 사명을 다하였습니다. 그 결과 역사와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뜻은 이루었으나 그와 함께 교단의 교세도 신학교의 교세도 많이 약화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의 정신은 떠남의 정신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영광보좌를 떠나 성육신하셨고,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십자가에서 마치고 다시 하늘로 떠나셨습니다. 나는 한신대학교와 우리 교단이 과거의 역사적 전통을 간직하면서도 자기부정의 부단한 과정을 밟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정신입니다. 그래야 변화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오늘 필요한 신학교와 교단의 사명과 역할을 다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끊임없이 연구하고 공부해서 영혼을 구원하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실력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실력 있는 신학교, 실력 있는 교단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을 살려낼 실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다른 교단과 비교 경쟁할 필요는 없겠지만, 과거 위대한 스승 장공이나 만우를 살려놓기 위해서도 우리 교단과 교회가 살아나야 합니다. 나는 스스로 실력을 갖추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습니다. 학점도 많이 받지 못하고 유학도 다녀오지 못했지만 가는 곳곳마다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고, 지역사회를 살려놓을 실력을 갖추기 위해 몸부림을 쳐왔습니다. 우리 신학교 교수들도 실력을 갖추어서 책을 한 번 써서 내놓았다 하면 온 한국교회에서 사서 읽어보고 싶게 되고, 우리 교단의 목사들도 자기 목회 경험을 책으로 써서 출판하면 한국교회 모든 목사들이 사서 읽어보고 싶게 만들어주면 좋겠어요.

    이강석

    목사님, 한신교회의 창립비전은 한국민족신자화이고 그 구체적 실현 방안은 100교회 개척이었습니다. 교회 개척을 비롯한 선교사역의 비전은 어떻게 유지 계승되어야 하겠습니까?

    巨智

    100교회 개척의 목표는 지금까지 60여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그러나 100교회 개척은 내 마음의 고백일 뿐이지 그다지 성공적인 사역은 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개척도 개척자를 훈련시키고, 개척 뒤에도 계속해서 구체적으로 점검하며 도와주어야 하는데, 본래 체력도 약하고 시간적 여력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위임하는 조직력까지 부족해서 교회 개척에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끈질기게 개척사역에 헌신한 몇몇 목사님들을 통해 교회가 굳게 선 경우도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개척 자금은 지출되었는데 그 결실로 남은 것은 미약합니다. 우리 교단 교세가 약해서 교단이 해야 할 교회 개척의 사명을 개교회가 담당한다고 하기는 해보았지만,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교회 개척에 일생을 걸고 사는 후배들에게 격려를 전합니다.

    이강석

    그래서 그런지 한신교회의 최근 선교사역은 교회개척보다 사회선교 영역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한국민족을 살리려는 선교사역은 앞으로 어떻게 발전되기를 원하십니까?

    巨智

    살림 사역은 크게 전도사역과 사회선교사역, 그리고 세계선교사역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도사역은 지역교회 차원에서는 전도와 교회개척으로 나뉩니다. 사회선교사역은 사회복지적 차원의 선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선교사역은 해외로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기장 교단은 교세가 작아서 교회 개척도 어렵고, 복지선교도 정신은 앞섰지만 물량은 작습니다. 세계선교도 신학적 마인드가 특별하기 때문에 해외로 선교하러 나가는 목회자도 매우 적습니다. 그래서 한신교회를 통해서라도 이러한 살림 사역을 추진해보려고 애를 써왔습니다. 후배 김해성 목사님이 외국인노동자선교사역에 너무 열심이어서 세계선교신학교와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 등에 작은 힘이라도 보태려고 교회 역량을 나누었습니다. 또 안산에서 김현수 목사님이 자기 가정을 열고 가출청소년들을 주의 사랑으로 돌보는 모습에 감동 받아서 한신예수가정과 안산청소년쉼터 한신, 들꽃피는학교 사역 등에 한신교회의 선교역량을 보탰습니다. 두 분 목사님 다 성실하게 사역해주시고, 또 우리 교회의 장로님들과 성도들도 공감하여 그래도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발전해서 주의 영광을 위해 많은 결실을 거두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강석

    목사님, 목사님은 별세목회연구원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습니다. 20 여 년 전에 한신목회개발원을 창립하여 제19회 전국목회자세미나와 여섯 번의 사모세미나를 개최하였습니다. 오늘날 한신목회개발원은 별세목회연구원으로 개편되어 별세신학을 체계화하고 그것을 목회 프로그램화하여 한국교회와 나누고 있습니다. 계간 “별세의 삶”과 별세목회아카데미, 코헨대학교 목회학박사과정을 통해서 별세신학과 별세목회에 대한 공감대가 한국교회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巨智

    별세목회연구원은 별세신학을 사상적으로 정립할 수 있게 해준 주요 터전이었습니다. 한신목회개발원이 창립되면서부터 별세를 말하기 시작하였으니까요. 최근 별세목회연구원으로 체제를 개편하면서 신학이 더욱 체계적으로 정리되었고, 실제 목회에 적용할 수 있는 교재들도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한신교회에서 별세목회연구원이 나왔고 별세신앙이 나왔지만, 별세신앙은 한신교회를 한신교회 되게 해주었습니다. 이 사역은 내가 가장 보람 있게 여기는 사역입니다. 한신교회는 별세가 살아야 교회도 살게 되어 있습니다. 별세사역을 통해서 한국교회에서 자기 위상을 갖춘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지금까지는 한신교회가 별세목회사역을 뒷받침했다면, 앞으로는 별세사역이 한신교회의 위상을 높이고 교회를 건강하게 부흥시키는 동력이 될 것입니다. 별세목회연구원과 그 사역이 계속 계승 발전될 것을 기대합니다. 이 일은 가장 보람 있고 행복한 사역입니다. 한신교회가 별세 없이는 의미가 없는 교회, 평범한 여러 교회 중의 하나로 전락할 것입니다. 별세를 소홀히 여기면 안 됩니다. 별세를 살리는 것은 예수님을 살리는 길이기 때문에 오직 주께만 영광이 됩니다.

    이강석

    별세신학은 가장 성경적 진리요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이기 때문에 주께서 이 신학을 살려놓고, 그 신학에 입각하여 이루어지는 목회를 축복하실 줄로 믿습니다. 목사님, 후배 목회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십니까?

    巨智

    언제나 오직 예수 오직 교회입니다. 이 정신으로 목회하면 후회가 없습니다. 나는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서로를 용납하고 이해하고 화해하면서 목회해야 된다고 굳게 믿습니다. 목사는 주님의 종이 되어야지 교파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 교회가 살고 자기 교단만 살려고 다른 교회 목사를 비방하고 다른 교단을 공격하면 주님께서 슬퍼하십니다. 오늘날 교파주의가 많이 불식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자기 교단 자기 교파의 의만 내세우는 편협한 분파주의가 남아 있습니다. 별세신앙은 이 분파주의를 극복하자는 신학운동이기도 합니다. 내가 20여 년 동안 초교파 전국목회자세미나를 해온 뜻 중의 하나도 여기에 있습니다. 어느 교단 어느 교파의 강사가 와도 은혜가 되고, 어느 교단 어느 교파의 목회자가 참석을 해도 은혜가 됩니다. 목회자들이 바리새적 정죄를 즐겨해서는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이루어야지요.

    이강석

    병상에서 최근 한국교회를 향해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목사님의 기도의 제목은 어떤 것입니까?

    巨智

    한국교회가 민족에 비전을 주는 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근대 역사 속에서 한국교회는 이 민족에게 비전을 주고 희망이 되었습니다. 복음이 처음 전파되었을 때 한국교회는 개화의 비전을 제시하고 민족을 이끌었습니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 한국교회는 민족의 독립과 해방의 비전을 주고 이 민족을 좌절과 절망으로부터 지켜주었습니다. 해방과 분단의 소용돌이 속에서는 유물론과 무신론의 망령과 싸우며 인간의 인격적 비전을 제시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지켰습니다. 장기집권과 개발독재의 시절에는 사람답게 사는 비전을 제시하여 이 민족을 가난으로부터 해방하고 한국민중을 인권침해로부터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화해와 통일의 비전을 제시할 때입니다. 교회가 민족에게 비전을 주고 민족을 이끌어갈 리더십을 발휘해야 합니다. 통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 민족을 통일로 이끄실 터인데 그 통일을 맞이하려면 이 민족 역사 속에서 용서와 화해의 사건이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별세의 복음입니다. 적을 죽이고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어 원수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부터 부활로 일으키시고 지극한 영광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또한 그 결과로 모든 이들도 용서를 받고 살아나는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신앙은 이데올로기가 아닙니다. 별세의 복음입니다. 동족상잔의 전쟁을 상기하며 증오를 키워갈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이고 완전한 용서를 선언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별세의 용서가 성취되는 날이 남북으로 대치된 한국민족이 화해하고 평화적으로 통일이 되는 그 날이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지도자들과 목회자들이 한국교회 성도들을 민족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이라는 비전으로 이끌어, 이 민족의 지도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한국민족은 세계를 이끌고 갈 영적 제사장 민족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강석

    목사님. 한신교회의 미래에 대하여 더 하시고 싶은 말씀은 없으십니까?

    巨智

    죽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미래를 염려한다면 아직도 죽지 않은 증거겠지요. 목사가 죽음에 이르러서도 죽지 않기에 교회가 예수님의 교회가 되지 못하고 목사의 교회로 남습니다. 그렇게 교회를 괴롭게 한다면 별세하지 못한 목사입니다. 목사는 사임하든지 죽든지 그 교회를 떠나야 합니다. 이제 나는 한신교회 목사를 완전히 떠나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더 할 말은 없습니다.

    이강석

    목사님께서 주창하신 별세신학의 패러다임은 떠남과 새 삶, 살림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부활하셨고, 부활하셨기에 세상을 구원할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떠나야 새 생명으로 살고 세상을 살릴 수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죽음을 맞아 피동적으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이 있을 때 교회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리고 떠남을 결단하는 그 마음 위에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새로운 생명과 능력이 담기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목사님. 이제 대담을 접을까 합니다. 목사님의 심경과 꼭 더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해주시지요.

    巨智

    나는 일관되게 빨리 주께로 가는 것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살아남아도 지금까지 한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가능성도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이제 주님이 데려가시려 하는데 그 뜻에 순종하므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려는 모양입니다. 끊임없이 감동하는 성령님의 생각이 그런 것입니다. 나의 생존을 위해 기도하는 눈물의 사람들에게는 고맙고 미안하지만, 하늘로 가게 하시는 뜻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마지막으로 이루는 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죽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나는 평소에 편안하게 죽기를 수십 년간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고통 가운데 죽음을 맞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소원을 거절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나를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죽음 이후 또 하나의 세계를 맛본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 것인지 하나님께서 체험케 하고 있습니다. 졸지에, 급박하게, 순간적으로 죽어서는 또 하나의 세계로 향하는 고통을 맛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부활의 새로운 세계를 진정으로 소망하게 하시며 체험케 하고 계십니다. 죽는 일, 그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렇지만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길입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도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태어나지만, 죽을 때도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죽어갑니다.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아 태어났고 살아왔으면,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으며 죽어가는 것도 산 자의 섬김이라고 믿습니다. 살고 죽는 것이 하나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별세신앙의 사생관입니다. 산 자만이 죽을 수 있고, 참으로 죽은 자만이 다시 살 수 있습니다. 부활의 산 소망을 품고 담담히 주께로 나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