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세목회신학

  • 01 별세의 개념

    별세(別世)는 이 세상을 떠나는 죽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별세는 사람이 죽은 후에 가는 다른 세상을 말한다. 별세는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세계라 할 수 있다. 모든 종교가 별세를 추구하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별세를 싫어한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고통과 불행, 허무의 극복을 별세 후로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죽은 후에 천국으로 갈 것을 확신하고 사모한다. 그리고 '그 곳에는 눈물이 없고, 슬픔이 없으며, 즐거움만 있다고 찬송을 부르면서 위로를 얻는다. 그러나 기독교는 죽은 후의 별세를 추구하는 것보다 현세에서부터 별세를 사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세에서 별세를 체험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천국은 죽은 후에 가는 영혼의 천국만이 아니요, 지금 현세에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새로운 세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죽은 후의 천국은 약속이요 현세에서 천국을 누리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 뜻을 이루는 것이 별세를 사는 것이다.

  • 02 성서적 이해

    아담의 별세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러나 창조된 그대로의 세계만으로는 인간이 행복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에덴을 창설하셨다(창2:8). 에덴은 어느 자연의 공간이나 동산이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교제하는 은혜의 세계요, 행복한 세계다. 그러므로 에덴은 낙원, 즐거움, 기쁨을 의미하는 행복의 동산이다.

    하나님은 오직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에덴을 만드셨다. 그리고 최초의 사람 아담에게 에덴 동산에 살게 했다. 그러나 아담은 행복하지 못했다. 그것은 사랑할 대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창 2:17).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다. 깊은 잠이 들었을 때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들고 아담이 사랑할 대상으로 삼게 하셨다. 아담은 깊은 잠(죽음)을 잔 후 진정한 에덴(행복)에 살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별세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시고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어 민족을 해방시키도록 하셨다. 그러나 바로의 마음은 강팍하여지고 더욱 악해졌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어린 양을 잡아 문설주에 바르고 집안에 있도록 하셨다.

    그날 밤 애굽 전역에 장자가 죽는 심판이 임했을 때 피가 있는 이스라엘 집은 안전하게 보호를 받았다. 이스라엘 백성이 보호받은 것은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기 때문이다. 바로 왕은 이 일로 모세에게 "네 백성을 인도하여 나가라"는 해방령을 내리게 된다. 이 일로 모세와 백성은 애굽을 나오게 된다. 출애굽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 가나안의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헬라어로 출애굽(Exodus)은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나가는(going out) 별세(Exodon)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세상을 떠나는 죽음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날 때 애굽에 대해 죽은 것이다. 어린 양의 죽음(별세)은 출애굽(별세)을 약속하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널 때 모세에게 속하여 다 세례를 받게 된다. 이것은 애굽을 떠나는 별세의 확증이다. 그러나 가나안의 약속을 받고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을 마음으로 버리지 못했다. 그리고 애굽을 가슴에 품고 광야에서 헤매다가 죽었다. 이것은 마음으로부터 애굽을 떠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광야에서 다 죽고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제2세들만 들어가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애굽을 떠나는(이별) 별세는 하였으나 다시 사는 별세를 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 03 별세의 복음

    예수님의 별세

    예수님은 세상에 오신 목적이 분명했다. 예수님은 세상에 섬기러 오셨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대속물로 주러 오셨다(막10:4). 예수님은 민중을 섬기러 오셨고, 별세하려고 오셨다. 당시 민중은 가난하고, 병들고, 버림 당하고, 권력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천대받는 사람들이었다. 민중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며 은혜를 받았으나 그것으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는 못했다.

    예수님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살았다. 그것은 별세(죽고 사는)하는 일이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려고 오셨다. 예수의 십자가는 죽음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고 새로운 삶으로 이어지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반드시 부활의 삶으로 이어지는 사건이다. 여기에 세상을 떠나는 별세와 다른 세상을 사는 별세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별세의 은혜를 주시러 오셨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었다. 예수님은 이 은혜를 베풀기 위해 오셨고, 이 은혜를 받아야 한다. 가난한 자나, 부자나, 건강한 자나, 병든 자나, 권력을 가진 자나, 소외된 자 누구든지 은혜를 받아야 한다. 이 은혜는 누구나 받아야 할 절대적인 은혜다.

    제자들의 별세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3년 동안 가르치신 목적은 제자들을 별세시키려는 데 있었다. 예수님은 선교사역의 목적이 바로 별세에 있음을 가르쳤다.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에게 고난을 받고 3일만에 다시 살아나리라"라고 하실 때 제자들은 '그럴 수는 없습니다다' 하고 만류했다. 이때 예수님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마 16:23)고 책망했다. 그리고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고 하셨다.

  • 04 별세의 사도

    별세의 증인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별세를 이루신 후 승천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제자들을 별세의 사람이 되게 하고 별세의 증인으로 세우셨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이 임한 후에 제자들은 달라졌다. 이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이 제자들에게도 일어나게 되었다. 예수님의 별세가 제자들의 별세로 나타난 것이다. 제자들은 이전 사람들이 아니었다. 전혀 다른 세상의 사람이 되었다. 이제 제자들은 가난해도 좋고, 핍박을 받아도, 감옥에 가도 좋았다. 저들은 별세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처럼 되어버렸다. 가치관이 달라지고, 사는 방법이 달라지고, 사는 세계가 달라지게 되었다. 저들은 이제 자신은 죽고 오직 예수로 사는 존재로 변했다.

    초대교회는 별세의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다. 별세의 공동체가 되었다. 이제는 이 세상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사도행전 2장 44절이하에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세상에 살고 있었으나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었다. 사는 목적이 달랐고, 자기 소유욕을 버리고 자유를 누릴 수 있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므로 토굴 속에 살면서도 기뻐하고 사형장에 끌려가면서도 찬송했고, 자기를 죽이는 자를 위해 기도했으며, 원수를 사랑하면서 용서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었다. 저들은 성령을 받고서 별세의 사람이 된 후로는 상상할 수 없는 능력이 나타났다. 세상에서 살고 있었으나 세상 사람들이 아니었다.

    별세의 사도 바울

    별세의 신앙으로 자신을 위대하게 만든 사람이 사도 바울이다. 그는 자기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자로 여겼기에 사는 것도 예수로 살고, 예수로 만족하고, 예수로 기뻐할 수 있었다. 이제는 부활된 그리스도의 영으로 사는 새 존재가 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현세에서 그의 삶을 별세시켰다. 감옥에 들어가도 별세를 누렸다.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자족할 수 있었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소유한 자처럼 살았다. 이제 별세의 사람이 되었기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배설물로 여기는 자가 되었다. 이제는 사나 죽으나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몸에서 존귀한 자가 되었고,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 순교자가 된 것이다.

    바울의 별세의 고백을 들어보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사도 바울은 죽은 후에 별세의 사람이 아니라 현재 별세의 사람이 되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 대하여 죽고 자기에 대하여 죽었다고 고백했다. 이제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해 살게 되었다.

  • 05 별세의 교회

    목사의 별세

    목회자의 최대의 과제는 먼저 별세의 증인이 되는데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별세를 통하여 구원을 성취하듯 목회자는 별세를 증거 해야 한다. 예수님이 별세하므로 모든 사람을 별세시키듯 목회자가 별세되어야 교인들이 별세하게 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혼자 죽으러 온 것이 아니다. 그 속에서 우리도 함께 죽도록 한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별세다. 목회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별세할 때 목자에게 속한 성도들도 함께 별세하게 된다. 그러므로 목사의 별세의 신앙과 삶은 목회의 최대 사건이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별세사건이 일어난 이후에 초대교회는 별세의 공동체가 된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많으나 이 세상이 전혀 변화되지 않는 것은 목사가 별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별세의 목사가 되는 것은 능력을 받는 것과는 다르다. 한때 권능과 능력으로 이 세상을 휩쓸던 종들이 타락하는 것은 권능은 받았으나 별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사가 죽어야 한국 교회가 산다.

    교인들의 별세

    별세가 예수 그리스도의 최대의 선교사역이라면 교인들을 별세시키는 것은 목회자의 최대의 과제다. 많은 형제들이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였다 할지라도 별세신앙을 확립하여 주지 않으면 죽은 후에 천국을 약속 받고 현실에서 탄식하는 나그네에 불과한 삶을 보내게 된다.

    많은 목회자들이 교인들을 세상에서 끌어내는데는 성공하지만 별세로 살게 하는 일에는 실패한다. 마치 모세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켰으나 가나안에 인도하지 못하고 광야에서 배회하게 만드는 것과 같다. 지금 교인들은 입으로는 예수를 말하나 마음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찾고 있는 이방인의 속성뿐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교인들을 광야에서 끌고 다닌다. 목회자가 별세의 가치관과 신앙고백으로 살게 될 때 목회현장은 달라지게 될 것이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죽고 살듯이 교인들은 목사 안에서 죽고 살기에 목사가 먼저 별세하면 교인들도 함께 별세 체험을 하게 된다.

  • 06 별세의 신학과 한국교회

    신학적 조화

    해방 이후 한국 교회는 보수와 진보의 양극적인 신학 구조 속에서 분열과 갈등을 거듭했다. 이러한 신학적 차이 때문에 교파주의 교회를 양산하여 사회의 빈축을 면치 못했다. 보수적인 교회는 인간의 행복을 미래에 죽은 후에 가는 내세에 약속하고 하늘나라를 동경하며 살도록 가르쳤다. 또 진보적인 교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고 이 사회를 개혁하는 사명을 강조하여 왔다.

    이러한 신학들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현세에서 괴롭고 고달픈 인생으로 탄식하며 살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현세와 내세의 이원적 사고와 갈등 속에서 살게 했다. 복음주의는 하늘 천국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요, 하나님의 선교 신학은 세상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 천국을 사모하는 자나 사회 정의를 추구하고 있는 자나 모두 거기에서 행복을 얻지 못했다는 데 문제가 있다.

    현세에서 현세와 내세를 동시에 만나는 삶의 조화를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바로 별세신학이다. 별세신학은 어떤 신학도 초월하여 만남의 장을 이루어 신학의 조화를 이루게 한다.

    교회성장 신학에 대한 해답

    한국 교회는 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세계를 놀라게할 만큼 경이적인 성장을 기록하였다. 근년에 이르러서는 교단에 따라 마이너스 성장이 보고되는 등 위기의 징후가 현저해지고 있다. 그동안 한국교회 강단의 기복주의적 메시지의 선포는 7-80년대 한국사회의 경제성장 과정과 맞물려 설득력 있는 전도의 메시지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절대빈곤은 사라졌고, 물질적 복만을 빌어주는 기복주의의 메시지는 더 이상 호소력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새로운 세대에게서 더욱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국 교회는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으로 교회 안에서 성공제일주의 메시지를 유포시켰다. 어떻게든 교회는 성장시키면 되고 목회는 성공하면 좋다는 사고가 교회성장의 방식이 복음적이고 성서적이어야 한다는 원칙이 지켜지기 보다는 기업경영이론이 여과없이 목회에 직수입되었던 것이다. 교단과 교파의 분열이 이와같은 기업경영식 목회와 기업간 경쟁방식을 방불케 하는 경쟁으로 인하여 교회성장을 더욱 촉진시켰다. 그러나 오늘에 있어서 이것은 교회 성장을 방해하는 족쇄로 우리 개신교회에 되돌아오고 있다.

    신앙거품 교인은 거품 신앙이 만들어 낸 결과이다. 복음의 순수성을 상실한 거품 신앙은 결국 거품교인을 양산하였던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한국교회는 복음의 순수성을 잃었다. 이것이 교회성장을 정체시키는 가장 결정적이며 근본적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가 물질적 축복과 성공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목회자들이 성도들의 인격과 삶을 그리스도를 닮은 자로 변화(별세의 인격)시키기 보다는 복 받기를 바라는 수동적 존재로 전락시킨 것이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삶에 인격적으로 동화(별세)되지 못하고 그의 삶과 신앙이 분리된 채 살아가고 있다. 그 결과 기독교와 교회에 대한 신뢰는 사라지고, 복음 전파와 교회성장은 원천적으로 벽에 부딪치게 되었던 것이다.

    목회자의 평생신학

    별세신학은 목회자가 평생 연구하고 훈련하고 추구해야 할 신학이다. 별세신학은 인격을 변화시키는 신학이다. 신학이 목회현장과 유리되고 목회자의 이론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별세신학은 목회자와 평신도가 함께 공유하며 함께 실천하는 신학이다.

    교회의 가장 큰 책임은 일차적으로 목회자가 지고 있다. 목회자가 변화하여야 한다. 목회자의 변화는 목회자의 별세에서 비롯된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도 별세하시기 위함이요(막 10:4), 예수님의 별세로서 제자들이 변화하고, 교회가 태동하는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제자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별세하자 초대교회는 그 질과 양에 있어서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다(행 2:43-47).

    별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와 함께 죽고 부활과 더불어 새로운 생명을 사는 것이다. 살아서 별세를 경험하지 못하는 자에게 죽어서 갈 수 있는 천국은 확증될 수 없다. 살아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된 삶을 사는 자라야 오는 세상에서도 천국을 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죽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 이생의 자랑과 육신의 정욕을 끊어야 한다.

    목회자가 먼저 별세의 증인이 되면 그에 따라 교회의 모든 문제는 순차적으로 해결될 것이다. 목회자가 별세하면 그 삶의 증거를 보고 교인들이 별세한다. 교인들이 별세하면 교회는 별세공동체로 거듭난다. 교회가 별세 공동체로 변화될 때 사회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교회의 갱신에 대한 신학

    한국 교회가 성장하면서 전 교회가 기복주의화하면서 복음의 순수성을 상실하고 인격적으로 성숙되지 못한 그리스도인을 양산하기 시작하고 있다. 여기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가 그 본질을 상실하고 비인격적인 종교집단으로 전락되어 가고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변화되짖 않는 것은 교회가 별세의 신학에 바탕을 두지 않고 있기 떄문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그 선포되는 복음을 별세의 복음으로 바꾸어야 한다. 교인들이 별세의 복음을 듣고 별세의 복음으로 양육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교인들의 별세는 목회자의 별세에 수반하는 열매이다. 별세한 목회자의 증인된 삶이 교인들을 가장 효과있게 별세의 삶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여기에 더불어 교인들을 별세의 삶으로 인도할 교육과 영성훈련이 제공되어야 할 것이다. 또 별세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장으로서 바람직한 가정 모델이 제시되어야 하며(별세의 가정), 별세의 증인으로서 지역사회를 섬길 봉사의 장이 마련되어야 하고, 직장과 지역 사회에서 별세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원칙과 방법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기복주의적 기대만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서는 불신자들이 가진 교회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교정할 수 없다.

    한국교회의 일치와 연합의 신학

    교회의 분열은 교회 성장 정체의 주요요인이 되고 있다. 주님이 한 분이시므로 교회도 하나이다. 그런데도 교파분열이 유지 확대되는 것에는 교회 지도자들이 별세하지 못한 데 그 이유가 있다. 교권에 노예가 되어 통합과 일치로 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지도자들의 별세가 요구된다.

    교회 연합과 일치의 한 단초로서 "별세신학"을 제안한다. 진보와 보수 신학의 차이는 보수 진영이 천국의 실재를 말하면서 복음화를 강조할 때, 진보 진영이 세상 속에서의 천국 실현을 말하면서 인간화를 강조한 데 있다고 요약할 수 있다. 별세는 내세의 천국을 현세에서 살자는 것이다. 별세의 인격이란 세상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복음화된 인간을 말한다. 별세란 교파 이기주의의 욕심을 죽이자는 것이다. "별세"를 매개로 하면 신학과 교리는 통일되고, 교파적 이권은 해소될 것이다.

    교회 일치와 연합을 온전히 이루기 전이라도 교단과 교단 사이, 교파와 교파 사이, 지역교회와 지역교회 사이에 지나친 경쟁과 부도덕한 갈등은 별세신학으로 극복할 수 있다. 민족 통일을 위한 한국 교회의 일치와 연합은 별세신학으로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세계화의 신학

    별세신학은 오늘날 전 세계의 정치 구조인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단점들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 이념을 성서적으로 제시하는 신학이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능력을 강조하여 끝없는 부를 축적하여 빈부의 갈등을 낳았고, 공산주의는 평등을 강조하여 무능한 인간을 양산하고 말았다.

    결국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어느 사상도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일생은 나눔의 일생이었다. 나눔은 같이 살기 운동이다. 더불어 살자는 정신이다. 혼자 잘 먹고, 혼자 잘 살자는 것은 예수 정신이 아니다. 오늘날 교회는 예수의 이름으로 독점하려는 사유화의 정신에 미쳐 있다. 예수님은 밥이 되어 주시려 오셨는데 교회는 세상을 밥으로 먹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사유화 하는 것을 축복으로 자랑하고 있다.

    목회는 나눔의 사역이다. 목회는 가진 자들과 안가진 자들이 나누며 살도록 돕는 일이다. 부자는 가난한 자와 나누고, 복음을 가진 자는 불신자와 나누고, 즐거운 자는 슬픈 자와 나누고, 권력을 가진 자는 소외된 자와 나누도록 하는 일이다. 지금 한국교회를 보라! 모두 다 사유화에 정신을 잃고 예수 이름으로 내 것을 만들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거기에 청중이 모여들고 있다. 이것을 부흥이라 말하고, 하나님의 큰 은혜로 자랑한다. 이제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

    예수님의 별세를 맛본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필요한 자들을 위해 나누기 시작했다. 어느 것 하나 자기의 것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행2:44-46)"

    하나님은 별세신앙을 가진 사람을 찾고 있다. 별세신앙을 가진 교회는 역사를 별세화시킨다. 별세신앙이 없는 교회는 아무리 성장해도 하늘 나라에 그 영혼을 추수하는 구령운동으로만 끝나고 만다. 그러나 별세신앙을 가진 교회는 그 민족 역사의 빛이요, 소금이 되는 것이다.